나는 초등학생때 조부님 서재에서 육당 최남선의 <백팔번뇌>(1926)라는 시조를 떠듬떠듬 읽어본 적이 있다. 조부님은 이 책 출간 2년 후 총독부근무시절에 작고하셨으니 두 분의 관계는 알 턱이 없다. 다만 내가 장성한 후 그의 시조중 <한우님>이 나의 애송시가 된 것이 조부님 덕이 아닌가 싶다.
다 알아 작만하야 미리미리 주시건만
밧자와 쓰면서도 나오는데 몰랏더니
어 ㅅ져다 ㅅ개단하옵고 고개 다시 숙어라
그의 글귀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배려가 녹아있는 한 인간으로써의 순수한 응답을 들을 수가 있다. “밧자와 쓰면서도” 자신의 모든 공로가 결국은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에 협력하도록 배려하셨다는 사실을 “어쩌다 살펴 알고”고개를 숙이는 겸손을 보였으니 말이다.
참고로 시제 <한우님>은 人乃天을 종지로 한 “한울님”이 아니라 그의 세례명(베드로)이 입증하듯 천주라는 뜻의 “하느님”을 시조답게 표기한것 같다.